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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이 생각

센스 있고 싶지만 실수하고싶진 않아

by 나은이😊 2022. 7. 10.

얼마 전에 업계 동기 모임에 나갔다.

대충 직장 회식보다는 편하고 찐친 모임보다는 어려운 그런 모임이라고 보면 된다.

 

6명이 중식당에 모여서 이것저것 시키다가 칠리새우도 시켰다.

가운데 칠리새우가 놓이고 가위와 집게가 놓였는데, 내 쪽에서 잡기 편하게 놓였다.

칠리새우를 잘라 먹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여기는 새우가 크고 통통해 보이기도 하고 굳이 가위와 집게가 놓인 거 보면 잘라 먹으라는 것 같기는 했다.

내가 주섬주섬 가위와 집게를 잡으면서,

"이거... 자를까요?"

하고 물으니,

동기 오빠 중 한명이 내 손에 있는 가위와 집게를 가져가려는 모습을 하기에 엉거주춤하게 건네 줬다.

"내가 잘라 드려야지~"

 

대충 농담처럼 지나간 말이긴 했지만,

'나님'이 새우 자르는 일을 하기 싫어서 동기 오빠에게 넘긴 듯한 상황이 되었다...;

 

혼자서 변명을 해보자면,

가위와 집게가 내 쪽으로 놓였으니 내가 자르는 게 센스 있는 것 같긴 한데,

새우를 자르는 게 맞는건지, 괜히 나섰다가 음식을 망치는 게 아닌지 걱정됐던 거다.

 

사회성이 보통 이상인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 병신같을 수도 있는데...

그래서 오해를 받더라도 할말은 없는건데...

몇번인가 이런 상황을 만든 적이 있는 것 같아서

글로 한번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


눈치껏 센스 있게 행동해야된다는 압박을 느낀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나는 그때 우리반 부반장이었는데,

어느 날은 전교회장 선거를 하는데 반별로 투표를 진행하고 표를 취합해서 개표하는 식으로 선거를 했던 것 같다.

 

반에서 학생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방송이 나왔다.

"각반 반장들은 교무실에서 투표용지를 가져가기 바랍니다."

우리반 반장도 투표용지를 가지고 왔다.

 

그 후에도 반장이 투표용지를 나눠주라는 둥, 투표용지를 걷으라는 둥 방송이 나왔고

반장의 지휘(?) 하에 나도 자리에서 적당히 투표를 했다.

 

우리반의 투표를 마치고 담임이 교탁으로 돌아왔다.

담임은 30대 여자쌤으로서 인기가 많았지만 약간 다혈질 끼가 있는 분이었는데,

들고 있던 출석부를 교탁 위로 쿵- 집어던지면서 하시는 말씀,

 

"야 정나은."

 

"...네?"

 

"반장이 투표 하느라 고생하고 있었던 거 안 보여?

다른 반은 부반장이 도와 가면서 투표 하더라.

...넌 어떻게 된 애가 그렇게 이기적이니?"

 

이 상황에 대해서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반장을 찾는 방송이 나왔을 때 반장은 아니었던 나는 방송을 너무 자연스럽게 무시해 버렸던 거다.

예를 들어 방송에서 '정나은 학생'이 아닌 '정다은 학생'을 찾았으면 무시하고 내 일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혼나게 된 상황에서

"저는 반장이 아니라 부반장이라서 같이 도와서 해야되는지 몰랐습니다"

라고 말하는 건 너무 궁색한 일이라는 걸 그때도 눈치는 챘기에 그냥 이기적인 사람으로서 혼나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스스로가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눈치가 없는 것도 '악'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순수악?)

나름대로 상황들을 도식화해서 사회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행동하려 노력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책을 가득 안고 가는 상황에서 친구가 나눠 들어준 적이 있다.

아마 친구는 '나은이가 무거워서 힘들겠다. 도와 줘야지'라는 생각으로 들어줬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도식화했다.

'친구가 무거운 거를 들고 갈때는 같이 들어주는 게 자연스러운 행동이구나'

그리고 나도 나중에 친구가 뭔가를 들고 가는게 보이면 "좀 들어줄까?"해서 같이 들고 가는 것이다.


대학교를 진학하면서부터는 다양한 상황들이 있었고, 각각의 상황에 대해 도식화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예를 들어 다같이 고기를 먹으러 가면,

"고기는 제가 구울게요!"라면서 가위와 집게를 집어보지만

긴 삼겹살을 위태롭게 집은 채로 잘라서 주변 사람들을 신경쓰이게 만들곤 했다.

 

다같이 중국음식을 시켜먹었을 때는

남들이 그릇을 싸고 있는 랩을 벗길 때 옆에서 주섬주섬 랩을 같이 벗기고는

나름대로 센스 있게 행동한다고 탕수육 소스를 말도 없이 부어버린 적도 있었다;;

 

고기 굽고 자르는 법은 나중에 자취하면서 익히게 되었고,

탕수육에는 부먹파와 찍먹파가 있다는 것을 야유를 들어가며 알게 되었지만

 

칠리새우가 나오면 또 어떻게 처리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는 거다...;;

 

지금 생각하기에는,

잘 모르는 일에 대해서 센스 있게 행동한답시고 했다가 실수하는 건 두렵다.

내가 괜히 나서서 실수하느니 더 잘 아는 사람이 나서서 행동하는 게 모두에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나서야 될것 같은 상황에서 상황을 외면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치는 것도 두렵다.

 

그렇다면  내가 나서야 할것 같은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되는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해야될까?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말'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까의 칠리새우 예시에서 "이거...자를까요?" 보다는

좀더 자신있는 어조로 "이거 잘라도 될까요?"라고 물었다면 자연스러웠을까?

아니면 오해를 샀다 싶을 때라도 "그게 아니라요 ㅠ 혹시 제가 맘대로 잘랐다가 실수할까봐서요"라고 말했다면 설명충같을지언정 그나마 오해는 덜 받았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살면서 오해를 받았을 때 말로 오해를 푸는 데 성공해본 기억이 없어서

내가 말을 삼키는 줄도 모르게 삼키고 체념하게 된다.

나이는 서른이 됐는데,

나의 말 하는 능력은

오해를 받고 왕따를 당하던... 초등학교 시절에서 크게 나아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는 '오해'를 주제로도 생각을 정리해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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